크로스 모드, 크로스 밴드 교신
1970년대 초보햄의 좌충우돌기 - 에피소드 2
무선국 허가 신청
무선국 허가를 신청했다. 여러가지 복잡한 서류들이 많아서 전부 합치면 얇은 책 두께만큼 되었다. 서류 양식을 구하고 전체 서류를 준비하는데 대략 한 달 정도는 걸렸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민간인 신원 진술서였다. 네 부를 자필로 작성해야 하는데, 어린 학생이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 쓰다가 틀리면 다시 써야 한다. 틀리지 않도록 또박 또박 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아마 10장 이상은 썼던 것 같다.
가까운 가족 또는 본인의 경력 중에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허가를 해 주지 않았는데, 민간인 신원 진술서를 참조하여 상당히 까다롭게 조사했다. 그리고 가까운 경찰서에서 직접 사람이 찾아와서 대면 조사도 했다. 이념 문제뿐만 아니라 군대 문제로 인해서 허가를 받는 데 10년 이상이 걸린 분도 있었다.
서류 처리 기간도 고무줄이라 기약없이 기다려야 했다. 작은 문제라도 있으면 서류가 반려되기 일쑤였다. 반려되면, 검토 중에 적색 볼펜으로 표시한 부분이 많아서 거의 모든 서류를 다시 작성해야 했다. 나의 경우, 허가 신청 후 8개월이 지난 다음에 가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허가를 기다리는 중에 신호 한 번 내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1편의 불법 무선국에 대한 변명이 너무 길어졌다. hi hi
무선국 허가를 신청하면서 송신기를 업그레이드했다. 특별한 내용은 없고 그저 출력만 조금 올렸다. 출력관으로 많이 사용했던 6146이라는 진공관을 한 개 사용하여 대략 50W 정도의 출력을 내도록 만들었다. 여전히 크리스탈을 사용하는 간단한 전신 송신기였다.
수신기는 Hallicrafters사의 S-40B를 사용했다. 1950년대에 만들어진 장비를 중고로 구입한 것이다.

Hallicrafters사의 S-40B.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그때의 자격 급수별 허가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3급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3급도 한글과 영문의 전신 실기 시험을 통과했지만 3급에게는 전신만 허용하고, SSB 허가는 해 주지 않았다. 해 준다고 해도 복잡한 SSB 송신기를 만들 능력도 없었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조금 이상할 수도 있다.
크로스 모드
고정 주파수로 전신만 운용하면 교신의 기회가 많지 않다. 특히 일요일 오전에 국내국의 SSB 신호가 들리면 교신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SSB 허가도 없었고 주파수도 다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다행히 당시에는 SSB국들의 교신에 CW국이 참여하기도 했다. CW로 브레이크(BK)를 하면 SSB국에서 응답을 해 주었고, 함께 라운드 교신을 진행할 수 있었다.
주파수가 딱 맞지 않아도 상대가 인지하면 수신기의 주파수를 돌려서 수신을 해 주었다. 어떤 분은 일부러 CW국이 없는지 확인도 해 주었다.
7MHz용의 크리스탈을 두 개 가지고 있었는데, 7.010과 7.025였다. 7.025 부근에서는 항상 중국의 방송신호가 들렸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국내국과의 교신에는 아주 유용했다. 어떤 때는 심지어 5kHz 정도 차이가 나도 수신을 해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당시에 SSB로 나오는 국내국들은 대부분 7.030MHz 부근에서 교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CW국의 참여를 배려한 것이었다. 아래 로그를 보면 SC 라고 써져 있는 교신이 SSB와 CW의 크로스 모드 교신이었다.

종이 로그북의 일부
하지만 이런 교신은 일요일에, 어쩌다가, 가끔 있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가지고 있는 두 개의 크리스탈을 이용하여 두 개의 고정 주파수만 송신할 수 있었다. 다른 주파수에서 나오는 CQ에는 응답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 답답했다.
크로스 밴드
7MHz에서 CQ를 내다가 응답이 없으면 수신기의 주파수를 다른 밴드로 돌려서 DX 신호를 수신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7MHz에서 CQ를 내다가 응답이 없어서 수신기를 14MHz에 맞추고 주파수를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HM5KY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나의 호출부호로 불법 교신을 시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HM5KY를 부르는 것은 소련의 무선국이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HM5KY는 응답이 없었다. 소련국은 다시 HM5KY를 불렀다.
당시의 불법무선국들은 기존 햄들의 호출부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글을 보는 분 중에 찔리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hi소련: 현재의 러시아 이전에 있었던 소비에트 연방을 줄인 말.
소련은 교신 금지 국가였지만 상대가 불러올 때는 가끔 교신하기도 했다.
주파수를 보니 14.020MHz 부근이었다. 순간 머리속이 반짝했다. 나의 7MHz 송신기 주파수가 7.010MHz였으니, 고조파인 14.020MHz가 송신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키를 잡고 QRZ을 송출했다. 그러자 그 소련국이 응답했다. 나는 7MHz에서, 상대는 14MHz에서 송신한 것이다.
참 황당한 교신이었다. 7MHz의 고조파인 14MHz가 송신되었던 것이다. 내가 만든 송신기가 얼마나 허접했는지 알 수 있다. 7MHz용의 안테나라서 14MHz의 신호는 상당히 약하게 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상대는 하바로브스크에서 나오는 무선국으로 14MHz에서 교신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거리였다. 연이어서 일본국과도 교신했다.
고조파: 기본주파수의 배수에 해당하는 주파수에서 나오는 신호.
기본주파수가 7.010MHz이면 2배수는 14.020MHz, 3배수는 21.030MHz, 4배수는 28.040MHz가 된다.

적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14MHz로 교신한 기록이다.
주파수는 사각형으로 표시했다. 당시에는 교신일지도 정기검사의 대상이어서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서로 다른 주파수에서 송신했지만 실제의 신호는 14MHz의 신호로 교신했으니 크로스 밴드 교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난 이후에는 7MHz에서 송신을 하면서도 7MHz와 14MHz를 번갈아 확인해야 했다.
메모리 기능도 없는 수신기로 매번 CQ를 낼 때마다 7MHz와 14MHz를 번갈아 확인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고, 3급은 14MHz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하면 허가외 송신으로 경고장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필터 회로를 추가하여 고조파 문제를 해결하고 안전하게 교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