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1300호
에피소드 8
발해 역사 축소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 출신 대조영이 만주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 내륙으로는 만주와 연해주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바닷길로는 동해의 패권을 쥐고 해양국가로서도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과 정보가 워낙 없다보니, 중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일본 등은 고대사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발해의 역사를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 중 특히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발해가 동해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발해 1300호
발해 1300호. 그들이 목숨을 걸고 발해 항로 탐사에 나선 것은 천년이 넘도록 역사속에 묻혀 잊혀져가는 발해사를 우리 눈앞에 살려내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육지에는 유적이나 고고학적 유물을 구할 수 있다지만, 바다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아우르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교역했던 뛰어난 해양국가 발해의 역사를 탐사를 통해서 되살리는 것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탐사대장 장철수, 선장 이덕영, 촬영담당 이용호대원, 통신담당 임현규대원.
4명의 탐사대원을 태운 무동력 뗏목선 발해 1300호가 1997년 12월 31일 블라디보스톡 끄라스키노항을 출발하였다. 자금 문제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계획된 출항일인 11월 5일보다 많이 지연되었지만 겨울철 북서계절풍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항해가 순조로운 날은 많지 않았다. 혹한의 겨울 날씨에 거센 바람과 파도, 추위와 싸워야했다. 항해일지에 적힌 내용을 보면, 바람이 심하게 불때는 뗏목이 날아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추위, 수면부족, 허기 등으로 몸도 지치면서 감기약으로 겨우 몸을 지탱해야 했다.
HL0JQT/MM
통신 방법은 선박용 통신기도 있었지만 아마추어무선이 큰 역할을 했다. 통신을 담당했던 임현규대원이 해양대학교 햄클럽에서 활동했으며, 해양대학교 아마추어무선국장 임재희씨가 발해 1300호 항해지원단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발해 1300호의 호출부호는 HL0JQT/MM이었다.
항해 초기에 통신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1월 6일부터 아시아나항공 햄클럽의 HL2WA 오엠이 중계를 하여 많은 국내 햄들과 교신을 하였고, 그 후부터 국내햄과의 교신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하루에 10~20여국씩 꾸준히 교신이 이어졌다. 아마추어무선 교신을 통하여 많은 분들이 격려를 해 주기도 하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지원단에게 소식을 전해줄뿐만 아니라 국내 소식을 전해주기도 해서, 아마추어무선이 대원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교신도 있었는데, JN4GUV오엠 등은 우호적인 교신을 하였지만, 일부 일본햄은 호출부호 송신도 없이 음악을 틀거나 휘파람을 불었고, 특히 JQ1FEF는 강력한 신호로 방해를 하여 교신에 어려움을 겪었다. JN4GUV오엠이 일본 우정성과 감시소에 연락하여 협조를 요청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교신은 주로 7MHz에서 이루어졌지만 상태에 따라 21MHz도 이용하고 육지와 가까울 때는 2m 교신도 이루어졌다.
폭풍으로 항로 이탈
항해는 순조롭지 않았다. 울릉도에 접안하려 했으나 북동풍의 폭풍으로 인해 뗏목은 육지쪽으로 향했다. 울릉도의 불빛을 보면서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보급 지원을 받기 위해서 몇 차례나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후포항 41마일 지점까지 뗏목이 밀려갔을 때 겨우 해경으로부터 보급품을 전달받았다.

모두 지쳐있었지만 곧 부산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으로 뗏목은 점점 동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원단에서도 동경 129도 안으로 들어올 것을 종용했지만 탐사대의 노력과는 달리 뗏목은 일본 오키제도 방향으로 마냥 흘러갔다. 라디오 방송도 한국어는 점점 멀어지고 일본어만 들리기 시작했다.
해류 변화와 일본의 태도
독도 접안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폭풍주의보로 인해 이마저 무산됐다. 이제 남은 것은 오키섬으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본의 우익은 발해와 관련된 탐사대의 활동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며, 오키제도가 속한 시마네현은 일본에서 유일하게 독도를 타케시마라고 규정하고 조례를 통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극우익 성향이다. 탐사대는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일본측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결국 일본 상륙을 기정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월 23일, 일본은 IMF라는 한국의 경제 상황을 틈타 수십년간 이어져 온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새로운 경제수역 경계선을 설정하고 이를 수용하도록 강하게 압박했다. 동해상에 일본 순시선을 배치하고 한국 어선을 나포하거나 폭행 및 강제 철수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순시선에 들이받혀 침몰하는 등 위협적인 태도를 노골화했다.
(장철수 대장이 1월 23일 오후4시 무렵에 작성한 일기)
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오늘 한·일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의 정신.
도고섬 근접 및 교신
오후가 되면서 뗏목은 점점 도고섬(오키제도의 섬 중 하나)으로 밀려가고 바다는 거칠어졌다. 이대로 가면 뗏목은 섬에 충돌한다. 빨리 일본과 연락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원팀에서는 해경을 통해서 일본 해상보안청에 뗏목 구조를 요청했고 6시 30분경 일본에서는 뗏목의 위치 파악에 나서 오키섬과 가까운 지점에서 표류하는 발해 1300호를 확인했으나 파고가 워낙 높아서 당장 구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후 8시경, 도고섬과 불과 2km밖에 남지 않았다. 7MHz에서 국내햄과 교신이 되었다. HL5KY(나), HL2WA, HL0BLA(한국해양대학교), HL5IXC, DS1CAN 등과 교신이 되었다.(발해 1300호의 통신일지와 나의 로그북을 참조함) 전파상태가 나빠지면서 국내교신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와 HL2WA오엠의 신호는 HL0JQT/MM에서 충분히 수신할 수 있어서 마지막까지 교신이 이어졌다. 다행히 8시 50분경 일본 순시선이 왔다고 하였다.
“순시선이 왔다. 걱정할 필요없다” “순시선이 온 것이 사실이냐” “예, 맞습니다. 이제 준비해야 하니 안테나를 철거하고 교신을 종료해야 합니다.”
나와 HL2WA오엠은 안심하고 교신을 마쳤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목소리가 될 줄은 몰랐다.
발해 1300호의 전복
다음 날 아침, 발해 1300호가 전복되어 전원 순직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시선이 왔고 안심해도 된다고 했는데 전복되었다니. 당시의 일본의 행태를 볼 때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방송사에서 연락이 와서 마지막 교신 상황을 물었지만 “순시선이 왔다. 안심해도 된다"는 내용만 전할 수밖에 없었다. 녹음이라도 해뒀으면 좋았을텐데.
이틀 뒤인 1월 26일 사고비상대책위와 유가족단이 일본 현지에 방문하여 해상보안청이 제공한 비디오 녹화 자료, 현지 상황 등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고라고 결론지었다. 일본에서는 경비함 3척과 구조 헬기 4대를 급파했으나 초속 20m의 강풍과 4m 이상의 파고에 휩쓸려 암반에 부딪쳐 좌초된 뗏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쵤영된 비디오 자료를 보고나서야 당시의 상황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힘들었다고 판단하였다.
이번 에피소드는 나의 개인적 경험보다 발해와 발해 1300호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와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싶었다.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발해를 단순히 만주 대륙에만 머물렀던 국가가 아니라, 동해를 거침없이 누비며 대외 교역을 전개했던 진취적인 ‘해양 강국’이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현대적인 동력 장치 없이 오로지 돛과 바람, 동해의 해류만을 이용해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도를 거쳐 일본 오키 제도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과학적인 GPS 데이터와 항해일지/통신일지로 이를 입증한 것이다.
장철수(탐사대장, 38세), 이덕영(선장, 49세), 이용호(촬영, 35세), 임현규(통신, 27세)
대원들의 명복을 빈다.
발해 1300호 홈페이지의 글
발해 1300호 홈페이지: https://www.balhae1300ho.org
(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의 글 중에서)
왜 한겨울인 12월 31일에 출발했느냐고 질책하고, 겨울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느냐며 무모하고 경솔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번 뗏목 탐험을 나선 경험자로서, 해양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로서 말하건대 출발 시기나 출발 장소는 문제가 없었으며, 그들은 고증에 충실했다. 설사 무모했다 하자. 하지만 진실을 찾기 위해 생명을 건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용기란 결국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는 행위다.
그들은 역사의 진실에 충실했다.
(발해1300호 항해계획서 중에서)
계획된 출항일은 1997년 11월 5일이었지만, 출항준비의 어려움으로(국내의 지원이 거의 전무 했다) 발해1300호는 두달여 연기된 12월 31일 끄라스끼노 항구를 출항했다.
1300년전 발해국의 일본으로의 뱃길 중 일본도착일을 고려할때, 현재 확인되는 34차 중 19회가 음력 11월,12월,1월이었다. 즉, 일본으로의 1달미만의 항해기간을 고려하면 절반이상이 겨울철에 떠난 항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1300호는 이러한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출항시기를 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왜 발해국과 발해1300호는 겨울철 항해를 택했는가?
다름아닌 겨울철에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배적으로 부는 ‘북서계절풍’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으며, 일본에서 발해로 되돌아갈때는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부는 ‘남동계절풍’을 이용하기 위하여 여름철 항해를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