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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5KY

국민학교때(1960년대말) 소년중앙이라는 어린이잡지의 부록(만화)을 보고 아마추어무선을 알게 되었다. 일반가정에서는 전화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에 수천만리 떨어진 곳에 사는 이방인과 대화할 수 있다는 꿈같은 취미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래의 에피소드는 개국 초기에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이다.

1 - 나의 첫 호출부호 JA6KOR

1970년대 초보햄의 좌충우돌기 - 에피소드 1

나도 신호를 내고 싶다

대부분이 그랬듯이 나도 SWL로 햄생활을 시작했다. 수신을 하고 SWL 카드를 보내서 햄들의 QSL 카드를 받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원거리의 신호를 듣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국내국의 신호를 듣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국내국의 숫자가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일요일 오전에 잠깐 국내국의 신호를 들으면 너무 반갑고 신기했다. 그 분들의 목소리는 유명 아나운서보다도 더 멋지게 들렸다. 나도 저렇게 송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때는 시험 보기가 쉽지 않았다. 시험이 자주 있지도 않았고 지방에서는 더욱 기회가 적었다. 시험에는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도 알지 못했다. 참고할 만한 자료는 프로 통신사 면허를 준비하는 책 몇 권이 전부였다. 겨우 시험에 응시해서 낙방이라도 하면 언제 또 기회가 올 지 몰랐다. 그때 시험에 떨어져서 몇 십년이 지난 후에 다시 햄을 시작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제나 저제나 시험을 기다리다가 진주에 갔을 때 HM5JF님에게서 송신기 회로를 얻었다. 6BA6 진공관으로 발진을 하고, 6AQ5 진공관으로 증폭을 해서 대략 5W 정도의 출력을 내는 전신 송신기였다.

1981년까지 한국의 아마추어무선국 프리픽스는 HM 이었다.

송신기 제작

가장 구하기 어려운 부속은 발진을 위한 크리스탈이었다. 주말에 학교를 마치면 선박 무선장비 수리와 부속을 취급하는 가게에 가서 부속을 찾아 보았다. 큰 나무상자 속에 여러 가지 부속이 섞여 있었는데, 손을 집어 넣고 사각진 부속을 찾아서 주파수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부속을 많이 산다면 전부 엎어놓고 찾을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면 손은 금방 시커멓게 되었다.


FT-243 형 크리스탈. 사진과 비슷한 모양이다.

가게 주인은 계속 눈치를 주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부속을 산다고 하더라도 비싸게 받을 수도 없으니 귀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끈질기게 그 가게를 드나들었다. 그렇게 몇 주를 다닌 끝에 드디어 햄밴드용의 크리스탈 몇 개를 손에 넣게 되었다.

알루미늄을 접고, 엉성하게 구멍을 뚫어서 부속을 조립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선만 얼기설기 연결한 수준이었다. 조립을 마치고 송신해 보니 수신기에서 신호가 수신되었다. 수신기의 안테나를 제거했는데도 막강한(?) 신호가 수신되었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말할 수가 없었다.


송신기는 대략 위의 사진과 비슷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만 오면 송신기의 키를 눌러서 수신해 보았다. 불법 송신이었다. 처음에는 낮은 출력으로 조심하면서 하다가 점점 최고 출력으로 송신하게 되고, 나중에는 주파수 상황도 신경쓰지 않고 키를 누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슬슬 간이 붓기(?) 시작했다. 불법으로 신호를 내는데 교신은 못하랴…

불법 교신

겁이 없어진 나는 교신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호출부호를 만들어야 했다. HM 호출부호를 사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국내국은 숫자가 적기 때문에 서로를 거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전신으로 신호를 내면 자작품 특유의 음색과 함께 수동키의 키잉 특징이 있기 때문에 CQ만 들으면,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전파감시국의 감청도 심했다.

그래서 가까운 일본의 호출부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아니, 만들기로 했다. 부산과 가까운 후쿠오카로 위치를 정하고 프리픽스는 JA6, 서픽스는, 정말 겁도 없이, KOR로 선택했다. JA6KOR. 이것이 나의 첫 호출부호였다. 이름은 Sato로 정했다. 그리고 전신 교신의 순서를 종이에 적어서 벽에 붙여두었다.

영문 교신 : 일본국끼리 교신할 때도 영문으로 교신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일본어의 전신 부호를 익히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영문으로만 교신하는 햄들이 더 많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리포트, 이름, 위치 등 간단한 내용만 교환한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송신을 시작하였다. CQ CQ CQ DE JA6KOR….. AR

한 번만에 응답이 올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출력도 작았으니까. 대략 10번쯤 송신했을 때 응답이 왔다. JA6KOR DE J….. 상대의 호출부호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도 제대로 수신했는지조차 기억이 없다. 땀이 나고 손이 떨렸다.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교신을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정상적인 허가를 받은 사람도 첫 교신에서는 긴장하는데, 남의 나라 호출부호를 만들어서 불법으로 송신했으니 그 긴장도는 가히 최고조였다. 긴장했던 만큼 첫 교신의 기쁨 또한 대단했다.

“안테나를 떠난 나의 신호가 바다를 건너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나라까지 갔단 말인가”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한편 순진한 마음에, 혹시라도 불법 운용이 들통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쁜 짓은 한 번 하기가 어렵지, 두 번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듯이, JA6KOR의 신호는 그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송출되었다. 이와 함께 전신 실력 또한 빠르게 향상되었다.

그때 햄을 시작했던 분이라면 아마 한 두번 불법 교신을 안 해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은 불법 운용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격시험이 자주 없었고, 무선국 개설이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에피소드를 통해 말씀드리는 것이니 재미로 가볍게 읽으셨기 바란다.

불법무선국을 흔히 UC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건너온 잘못된 영어다.
undercover의 사전적 뜻은 “비밀 또는 위장 첩보 활동을 하는 요원"을 말한다.
미국햄에게 UC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더니, ‘University of California’를 말하느냐고 되물었다.
영어로 불법무선국은 ‘pirate’이라고 한다.
W6KP와의 교신 듣기

2 - 크로스 모드, 크로스 밴드 교신

1970년대 초보햄의 좌충우돌기 - 에피소드 2

무선국 허가 신청

무선국 허가를 신청했다. 여러가지 복잡한 서류들이 많아서 전부 합치면 얇은 책 두께만큼 되었다. 서류 양식을 구하고 전체 서류를 준비하는데 대략 한 달 정도는 걸렸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민간인 신원 진술서였다. 네 부를 자필로 작성해야 하는데, 어린 학생이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 쓰다가 틀리면 다시 써야 한다. 틀리지 않도록 또박 또박 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아마 10장 이상은 썼던 것 같다.

가까운 가족 또는 본인의 경력 중에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허가를 해 주지 않았는데, 민간인 신원 진술서를 참조하여 상당히 까다롭게 조사했다. 그리고 가까운 경찰서에서 직접 사람이 찾아와서 대면 조사도 했다. 이념 문제뿐만 아니라 군대 문제로 인해서 허가를 받는 데 10년 이상이 걸린 분도 있었다.

서류 처리 기간도 고무줄이라 기약없이 기다려야 했다. 작은 문제라도 있으면 서류가 반려되기 일쑤였다. 반려되면, 검토 중에 적색 볼펜으로 표시한 부분이 많아서 거의 모든 서류를 다시 작성해야 했다. 나의 경우, 허가 신청 후 8개월이 지난 다음에 가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허가를 기다리는 중에 신호 한 번 내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1편의 불법 무선국에 대한 변명이 너무 길어졌다. hi hi

무선국 허가를 신청하면서 송신기를 업그레이드했다. 특별한 내용은 없고 그저 출력만 조금 올렸다. 출력관으로 많이 사용했던 6146이라는 진공관을 한 개 사용하여 대략 50W 정도의 출력을 내도록 만들었다. 여전히 크리스탈을 사용하는 간단한 전신 송신기였다.

수신기는 Hallicrafters사의 S-40B를 사용했다. 1950년대에 만들어진 장비를 중고로 구입한 것이다.


Hallicrafters사의 S-40B.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그때의 자격 급수별 허가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3급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3급도 한글과 영문의 전신 실기 시험을 통과했지만 3급에게는 전신만 허용하고, SSB 허가는 해 주지 않았다. 해 준다고 해도 복잡한 SSB 송신기를 만들 능력도 없었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조금 이상할 수도 있다.

크로스 모드

고정 주파수로 전신만 운용하면 교신의 기회가 많지 않다. 특히 일요일 오전에 국내국의 SSB 신호가 들리면 교신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SSB 허가도 없었고 주파수도 다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다행히 당시에는 SSB국들의 교신에 CW국이 참여하기도 했다. CW로 브레이크(BK)를 하면 SSB국에서 응답을 해 주었고, 함께 라운드 교신을 진행할 수 있었다.

주파수가 딱 맞지 않아도 상대가 인지하면 수신기의 주파수를 돌려서 수신을 해 주었다. 어떤 분은 일부러 CW국이 없는지 확인도 해 주었다.

7MHz용의 크리스탈을 두 개 가지고 있었는데, 7.010과 7.025였다. 7.025 부근에서는 항상 중국의 방송신호가 들렸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국내국과의 교신에는 아주 유용했다. 어떤 때는 심지어 5kHz 정도 차이가 나도 수신을 해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당시에 SSB로 나오는 국내국들은 대부분 7.030MHz 부근에서 교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CW국의 참여를 배려한 것이었다. 아래 로그를 보면 SC 라고 써져 있는 교신이 SSB와 CW의 크로스 모드 교신이었다.


종이 로그북의 일부

하지만 이런 교신은 일요일에, 어쩌다가, 가끔 있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가지고 있는 두 개의 크리스탈을 이용하여 두 개의 고정 주파수만 송신할 수 있었다. 다른 주파수에서 나오는 CQ에는 응답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 답답했다.

크로스 밴드

7MHz에서 CQ를 내다가 응답이 없으면 수신기의 주파수를 다른 밴드로 돌려서 DX 신호를 수신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7MHz에서 CQ를 내다가 응답이 없어서 수신기를 14MHz에 맞추고 주파수를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HM5KY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나의 호출부호로 불법 교신을 시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HM5KY를 부르는 것은 소련의 무선국이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HM5KY는 응답이 없었다. 소련국은 다시 HM5KY를 불렀다.

당시의 불법무선국들은 기존 햄들의 호출부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글을 보는 분 중에 찔리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hi

소련: 현재의 러시아 이전에 있었던 소비에트 연방을 줄인 말.
소련은 교신 금지 국가였지만 상대가 불러올 때는 가끔 교신하기도 했다.

주파수를 보니 14.020MHz 부근이었다. 순간 머리속이 반짝했다. 나의 7MHz 송신기 주파수가 7.010MHz였으니, 고조파인 14.020MHz가 송신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키를 잡고 QRZ을 송출했다. 그러자 그 소련국이 응답했다. 나는 7MHz에서, 상대는 14MHz에서 송신한 것이다.

참 황당한 교신이었다. 7MHz의 고조파인 14MHz가 송신되었던 것이다. 내가 만든 송신기가 얼마나 허접했는지 알 수 있다. 7MHz용의 안테나라서 14MHz의 신호는 상당히 약하게 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상대는 하바로브스크에서 나오는 무선국으로 14MHz에서 교신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거리였다. 연이어서 일본국과도 교신했다.

고조파: 기본주파수의 배수에 해당하는 주파수에서 나오는 신호.
기본주파수가 7.010MHz이면 2배수는 14.020MHz, 3배수는 21.030MHz, 4배수는 28.040MHz가 된다.




적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14MHz로 교신한 기록이다.
주파수는 사각형으로 표시했다. 당시에는 교신일지도 정기검사의 대상이어서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서로 다른 주파수에서 송신했지만 실제의 신호는 14MHz의 신호로 교신했으니 크로스 밴드 교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난 이후에는 7MHz에서 송신을 하면서도 7MHz와 14MHz를 번갈아 확인해야 했다.

메모리 기능도 없는 수신기로 매번 CQ를 낼 때마다 7MHz와 14MHz를 번갈아 확인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고, 3급은 14MHz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하면 허가외 송신으로 경고장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필터 회로를 추가하여 고조파 문제를 해결하고 안전하게 교신하였다.

3 - 7010kHz 수정발진 송신기

1970년대 초보햄의 좌충우돌기 - 에피소드 3

아마추어무선기사 시험

나는 아마추어무선기사 3급으로 시작했다. 당시의 자격 급수는 1, 2, 3급의 세 개로 나누어져 있었고, 3급은 전신, 전화급의 구분이 없었다. 3급도 전신 실기시험이 필수과목이었는데, 영문 전신뿐만 아니라 한글 전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이 지금보다 어렵기도 했지만 아마추어무선사 자격시험에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전신시험이었다.

1급은 50부호(10wpm), 2급은 35부호(7wpm), 3급은 25부호(5wpm)의 속도였다. 25부호가 느린 속도이지만, 장점과 단점을 3:1로 송신하면 장단 구분이 잘 되지 않아서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시험장에서는 스트레이트키로 카셋트에 녹음한 것을 들려주는데 음색도 나쁘고 장단비율도 왔다갔다 한다.

일부러 단어 간격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데 엉뚱한 단어가 나오면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그 다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I am a boy"를 “Ia ma boy"로 송신하면 어디서 띄어쓰기를 해야 될까 생각하다가 다음 부호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국가 안보 등의 이유로 아마추어무선사들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런 것도 시험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모르겠다.


송신은 시험관 앞에서 스트레이트키로 직접 송신을 하면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다. 자신이 사용하던 키를 가져가도 된다. 약간의 연습 시간을 준 후에, 시험관이 녹음 준비를 하고, 전보 용지를 펼치면서, 시작하라고 하면 전보 용지에 적힌 내용을 송신하면서 녹음한다. 어떤 사람은 너무 긴장해서 손에서 땀이 뚝 뚝 떨어지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시험에 합격률도 높지 않았다. 내가 시험에 합격한 것은 거의 행운이었다.

운 좋게 합격

영문 전신은 불법무선국의 운용으로 1급 이상의 속도라도 자신이 있었지만, 한글은 전혀 연습할 기회가 없어서 겨우 부호만 외운 수준으로 시험장에 나갔다. 긴장하면서 수신하는데, 한 두 단어를 받아보니 자주 보았던 전파법규의 문장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다. 상상수신을 하면서 비교적 수월하게 수신하였다. 정말 운이 좋았다.

시험에서 그런 행운이 없었다면 그 이후에 대학 입시 준비로 바빠지고, 대학 입학, 군 입대, 취업, 결혼…… 그러다보면 햄을 시작이나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아마 많은 분들이 비슷한 상황이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글 전신 교신

햄을 시작하기 전에는 방과 후에 친구들과 축구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지만 개국 후에는 모든 관심이 교신이었다. 트랜스에서 나는 노릿한 냄새는 나에게 강력한 중독제였다. 집에만 오면 가방을 던져둔 채 송수신기의 전원을 넣는 것이 우선이었다.

주파수를 돌려보다가 CQ를 낸다. 7.025MHz에서는 거의 하루 종일 중국의 방송 신호가 들리기 때문에 대부분 7.010MHz을 사용했다. 1977년 어느 날이었다. 나의 CQ에 HM4LF라는 분이 응답해 왔다. 얼마 전에 신규 개설을 했다고 한다.

국내국과의 전신 교신이 흔치 않은 일이라 반가운 마음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한글 교신을 자주 하지 않다보니, 상대의 송신을 제대로 수신하지도 못하고 송신도 말이 꼬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었다. 서툰 한글 전신으로 겨우, 아쉽게 교신을 마쳤다.

며칠 후부터 그 분의 신호가 자주 들렸다. 그런데 계속 7.010MHz에서 교신하였다. 하루, 이틀, 사흘…… 겨우 두 개의 크리스탈만 가진 나는 너무 답답했다. HM4LF님을 호출했다. 그리고 나의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주파수를 사용해 주실 것을 정중히 부탁드렸다.

그런데 전혀 예상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7.010MHz 크리스탈 하나 뿐이다”

“아이쿠, 이런 ……”

그 후부터는 어쩔 수없이 두 사람이 자주 교신할 수밖에 없었다. HM4LF님은 프로통신사였기 때문에 전신 실력이 대단했다. 덕분에 나의 한글 전신 실력도 일취월장하였다.

정경철오엠님, 어디 계십니까? 다시 전신에서 뵙고 싶습니다.

4 - 전신으로 듣는 로동신문

1970년대 초보햄의 좌충우돌기 - 에피소드 4

간첩 신고

우리는 항상 북한과 긴장 관계에 있다. 지금도 북한은 수시로 미사일을 뻥 뻥 쏘아올려서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볼 때, 한국에서 사는 것은 정말 불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고 있지 않은 것 같다.

1970년대에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국가 안보에 대한 교육과 홍보를 강화한 덕분에 반공에 대한 인식이 철저했다. 가끔씩 간첩이나 무장공비 사건이 일어났으니 일반인들도 북한의 존재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반공 의식은 우리의 취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마추어 무선에서 빠질 수 없는 ‘무전기, 모오스, 안테나, 단파’ 이런 단어들은 전부 ‘간첩’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었다. 간첩 신고 홍보물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그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신고 포상금도 상당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은연중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날도 저녁 늦게까지 수신기 앞에 앉아 있었다. 교신은 제대로 안됐지만 수신기는 계속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잘 안 들리면 스피커에 귀를 갖다대고 온통 그 신호에 집중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구둣발채 들어온 서너명의 순경들이 나에게 칼빈총을 겨누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었다. 살짝 스쳐 지나갔지만, 나를 보는 순경도 놀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까까머리의 학생이 앉아 있으니 이상했을거다.

아버님이 오셔서 무선국 허가장을 보여주고, 우유 한 잔을 대접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하는 사건이었다. 주변의 누군가가 신고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늦은 밤에 모오스 소리가 들리니 간첩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로동신문

그전에는 단파방송도 많이 들었다. 미국, 일본뿐만 아니라 중공, 소련의 한국어 방송 그리고 북한 방송도 자주 들었는데, 그 일을 겪은 후로는 그런 방송은 듣기가 겁이 났다. 북한 방송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법이라고 알고 있었다.

송신 주파수가 한정되어 있으니 교신은 잘 안되고, 그러다보니 교신보다는 수신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7MHz는 근거리만 들렸지만, 14MHz나 21MHz에서는 원거리 신호가 많이 들려서 수신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수신기를 대충 돌리는 것이 아니고 밴드의 아래부터 끝까지 하나 하나 신호를 체크했다.

21.100~21.150MHz에서는 느린 전신으로 교신하는 초보 무선국이 많았다. 느리지만 영어로 래그츄를 하는 사람도 있어서 듣는 재미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주파수 부근에서 상당히 강한 신호가 들렸다. 속도도 제법 빨랐다. 기본적으로 빠른 속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무지 단어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한참을 헤맸다.

그런데 영어가 아니고 한글로 단어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21MHz에서 국내국의 신호를 들은 적이 없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국내국 신호가 들려서 너무 반가웠다. 한글 수신이 잘 안되던 때라 정확한 해독은 어려웠다. 그런데 중간 중간에 들리는 단어가 이상했다. ‘김일성’, ‘수령’ …… 이런 단어들이 들렸다. 얼른 볼륨을 낮추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 신호는 최소 1시간 이상 계속 되었다.

지난 번 사건도 있고 해서 겁이 났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지 궁금해서 계속 다이얼을 그 주파수로 돌리게 되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전 시간에 1~2시간 정도 수신되었다. 상대가 없이 일방적으로 송신만 하는 신호였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혼자만 수신했다. 계속 수신하면서 조금씩 한글 수신 실력도 나아져서, 송신 내용이 로동신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주 듣지 않게 되고 언제부터인지 신호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 신호를 어디서, 누가, 왜, 송신했는지 알 수가 없다. 21MHz는 근거리가 스킵되기 때문에 그 정도 신호였다면 500~1,500km 거리가 아니였을까 하는 짐작만 할 뿐이다.

한글 모오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신호에서 사용한 한글 모오스와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모오스에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ㅐ’와 ‘ㅔ’라는 복합모음을 하나의 부호로 사용하지만, 그 신호에서는 ‘ㅐ’를 ‘ㅏ’와 ‘ㅣ’로 분리해서 송신하고 있었다.

기록을 찾아보면, 최초에 한글 모오스를 개발했을 때는 모든 복합모음은 기본모음으로 하나씩 분리해서 사용했다. 즉, ‘ㅐ’를 ‘ㅏ’와 ‘ㅣ’로 분리해서 사용했다. 로동신문의 그 신호처럼 말이다. 복합모음 중에서 ‘ㅐ’와 ‘ㅔ’를 하나의 부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라고 한다. 최소한 1960년대에는 이미 지금의 한글 모오스가 정착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중후반에 수신한 신호에서 아직까지 옛날 방식의 한글 모오스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북한의 모오스가 아닌가 생각한다. 북한은 언어나 관습 등에 큰 변화를 주지 않고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모오스도 처음 그대로의 형태를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다.

5 - 다양한 경고장

1970년대 초보햄의 좌충우돌기 - 에피소드 5

경고장이란

아마추어무선은 공공의 재산인 전파를 사용하기 때문에 전파법규를 잘 지켜야 한다. 만약 법을 어기면 그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작은 위반 행위까지 모두 처벌하는 것은 행정력의 낭비가 되니 우선 경고 또는 주의를 주어서 추가적인 위반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관리한다. 이때 발행하는 문서가 계고장 또는 주의장이다. 흔히 경고장이라는 용어로 알려져 있다.

지정외 전파형식 사용

처음 계고장을 받은 이유는 “지정외 전파형식 사용"이었다. 1970년대에는 3급 아마추어 무선기사에게 전신만 허가해 주었는데 SSB로 교신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신년컨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는데 리포트를 교환하는 그 짧은 순간에 딱 걸린것이다.

아래 그림과 같은 계고장이란 걸 처음 받고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게다가 계고장에는 “한 번만 더 걸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는 경고성 문구도 들어있으니 제대로 겁을 먹었다.


운용정지

그런데 그런 협박성 경고들이 생각보다 약발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채 3주도 지나지 않아서 똑 같은 위반하였다. 당시에는 국내국의 숫자가 적어서 7MHz에서도 국내국의 신호를 듣기가 쉽지 않았는데 어쩌다 들리는 SSB 무선국을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또 다시 계고장이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한 달간의 운용정지 처분을 받았다.


3급에게 전신은 허가해 주고 SSB는 허가해 주지 않는 것은, 그때는 별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논리에 잘 맞지 않는다. SSB 무전기는 만들기 어려우니 실력도 안되는 초보가 만들어서 꽥꽥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인지, 아니면 초보 시절에 전신 실력이나 제대로 닦으라는 배려깊은 친절인지 모르겠다. 어떻든 덕분에 전신 하나는 제대로 익혔다.

호출방법위반

운용정지 처분까지 받았으니 그후로는 위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잘못하면 무선국 폐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더 이상 경고장을 받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위법에 대한 차이는 있었다. 위의 경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였고 아래의 내용들은 그것이 위법인지 아닌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위법을 하게 된 경우다. 그래서 심각한 위법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주의장을 받았다.

오래전에 SK한 HM5JE 오엠이 남해에 계실 때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신으로 스케쥴교신을 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개 한 두시간씩 전신교신을 즐겼다.

어느날 스케쥴교신 시간이 되어서 JE 오엠을 호출하였다. “HM5JE HM5JE DE HM5KY K” 몇 번이나 호출해도 응답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중도가 떨어졌다. “HM5JE HM5JE HM5JE HM5JE DE HM5KY HM5KY K” 계속 호출해도 응답이 없어서 그날은 교신을 포기했다.

얼마후 주의장이 왔다. 상대방의 호출부호를 3번 이상 불렀기 때문에 “호출 방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정해진 주파수내에서만 운용하면 그 내부에서의 운용은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까지 단속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모든 운용을 일반 무선국과 동일한 잣대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엄격했다.

불요통신

또 다른 주의장도 전혀 위법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HM5MP오엠과 교신하면서 두 사람만 아는 내용을 농담처럼 얘기한 것에 대해서 “불요통신"이라고 주의장을 받니다. 아래 내용을 보시라. 이게 정말 주의장을 받을 내용인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추어무선에서 필요한 통신이 무엇이며, 또 불필요한 통신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시에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명분하에 아마추어무선에 대해서 대단히 비우호적이었다. 교신 중에 나오는 “아담"이 음어라고 한다면 그나마 이해가 되지만 업무용 해상국도 아니고 아마추어무선사에게 “불요통신"이라니, 그러면 교신을 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라는 것인지, 참… 행정관서의 공권력도 막강하던 시절이라 그냥 조용히 받아들였지만 지금이라면 아마 행정심판이라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데…… 함께 교신한 HM5MP오엠은 이 교신에 대해서 주의장을 받지 않고 나만 받았다. 나는 전과(?)도 있고 만만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HM5MP 오엠이 “Military Police"라서 뭔가 뒤로 은밀한 압력을 행사했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MP오엠은 항상 자신을 “멍청이 파파"라고 하시는데 연막전술일지 모르니 MP오엠과 만나면 경계태세를 잘 유지하시기 바란다. hi hi

허가장소외 운용, 목적외 통신

경고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사를 하고 나서 변경허가를 받지 않고 운용하여 “허가장소외 운용” 그리고 6편에 나오는 “목적외 통신"까지 참 다양한 경고장을 받았다. 겁없이 좌충우돌한 초보햄이지만 정도가 좀 심하긴 했다. 경고장을 받은 것이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항상 전파법규를 잘 지키면서 즐거운 교신 하시기 바란다.

6 - EL0AP/MM

1970년대 초보햄의 좌충우돌기 - 에피소드 6

EL0AP/MM

EL0AP는 HL5AP오엠이 라이베리아 선박에서 통신장으로 재직하실 때 사용한 아마추어국의 호출부호였다. MM(Maritime Mobile)은 해상이동국을 뜻한다. 라이베리아는 세제, 금융 등 여러가지 혜택을 주기 때문에 해외 대형 선사들이 선박을 등록하는 기국으로 유명하다. 선사나 선박이 달라도 라이베리아에 등록된 선박에서 계속 일을 하셨기 때문에 동일한 호출부호를 오랫동안 유지하셨다. AP오엠뿐만 아니라 EL0로 나오는 MM국이 여럿 있었다.

AP오엠은 거의 해외에 계셨기 때문에 개국 전에는 AP오엠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는데, 개국 후에 알고보니 내가 사는 곳과는 약 200m 거리에 계셨다. AP오엠은 아버님과 동갑이셨고 사모님은 어머님과 같은 계꾼이셨다.

선박에서는 주로 롱와이어 안테나를 사용하였다. 길이가 충분히 길었고 주변이 탁 트인 바다 위에서 나오는 신호라서 생각보다 잘 들어왔다. 나와는 주로 CW 교신을 많이 했는데 선박통신사들의 특이한 타전 습관 때문에 조금 애를 먹기도 했다. 한 부호의 끝과 다음 부호의 시작을 기준보다 많이 붙여서 타전하는 것이다. 부호 자체만 듣는다면 상당히 멋있는 박자감을 느낄 수 있지만 기준대로 연습한 아마추어무선사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제 3자 통신

1980년 1월 말경이었다. 호주와의 SSB 교신이 끝나자 AP오엠이 나를 호출하셨다. 필리핀 해역을 지나고 있다고 하셨다. 당시 둘째 아드님이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전화로 확인하니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이틀 뒤에 다시 교신하기로 하였다.

이틀 뒤, 교신 전에 미리 합격된 것을 확인하고 합격 소식을 전해드렸다. 그랬더니 배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던 한국인 선원들이 자신들의 가족에 대해서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제 3자 통신"이 불법이란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런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모두 전화로 확인하여 소식을 전해주었다. 다행히 전부 좋은 소식이라 나도 기분이 좋았다. 물론 마지막 느낌은 싸~~했지만…

불길한 예감은 항상 그렇듯이… 어김없이 주의장을 받았다. 주의장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다. 녹음 내용을 적었는데, 각각 A, B로 적었다. A가 나의 송신이고, B가 AP오엠이다. AP오엠의 송신은 잘 수신했는데 나의 송신은 제대로 수신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불감지역

21MHz와 같이 높은 주파수는 원거리교신에는 좋지만 근거리교신은 불감지역(Skip Zone)이 생겨서 불리하다. 내가 살던 해운대와 부산전파감시국과는 20km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간에 높은 산이 있어서 직접파로 전송이 되지 않고 전리층 반사는 상당히 약하게 되는 불감지역이었다. 그래서 내가 송신하는 내용은 제대로 수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든 또 경고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면역이 생겨서 별로 걱정도 안됐다. 그러다가 폐국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된다. 경고장을 자주 받다보니 요령이 생겼다.

주의장의 참고사항에 보면 “1981년 1월 31일까지 기준 점수에 도달하면 어떻게 하겠다"라고 되어 있다. 위반 점수는 1년 이내에 추가 점수가 없으면 리셋된다. 0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심각한 위반이 계속되지 않으면 폐국까지 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런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경험과 불필요한 지식이다. 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좋다고 하지 않는가.

7 - 무선은 사랑을 싣고

에피소드 7

한국인 단독 요트 기록

강동석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가?

1991년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단독 요트 태평양 횡단이라는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백인들의 독무대인 바다에 뛰어들어 한국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지만 큰 사건이었다. 요트는 해군사관학교의 해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영구 보존되고 있을만큼, 그때는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그 이후 1992년에 LA에서는 흑인폭동이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교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었다. 강동석씨는 또 다시 요트 항해를 계획하였다. 교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한국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고 싶어서 이번에는 세계 일주를 계획하였다. 1994년 1월에 출발하여 3년 5개월만인 1997년 6월에 한국인 최초로 단독 요트 세계일주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요트에서 햄 교신

강동석씨가 항해를 할 때 해상통신장비도 사용하였지만 아마추어무선사 자격증도 취득하여 KC6OWH/MM이라는 호출부호로 HAM 활동도 하였다. 나와는 1차 항해인 태평양 횡단을 할 때 많은 교신을 하였다.

태평양 횡단은 LA에서 출발하여 하와이를 거쳐 부산으로 항해하였는데, 하와이까지는 주로 LA 한인햄들과 교신하였고, 하와이를 지나면서 한국과의 교신이 많았다.


< 강동석씨 저서, “그래 나는 바다에 미쳤다"에서 발췌 >

당시에 나는 집과 회사가 아주 가까워서, 짧은 시간이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교신이 가능하였다. 집이 광안리 바닷가와 가깝고 바다쪽으로는 확 트인 위치였으며 빔안테나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태평양과는 교신이 잘 되었다.

국민학교 담임 찾기

거의 매일 점심때 30~40분 정도 교신하였다. 14MHz와 21MHz로 교신하였는데 서로의 리포트가 55~57 정도여서 대화하기에 충분하였다. 요트나 항해와 관련된 대화가 많았지만 그 외에도 이민생활이나 가족, 친구 등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강동석씨는 한국어를 듣는 데는 거의 문제가 없었지만, 말하기는 약간 어려움이 있었다. 교신을 하면서 짧은 시간에 한국어 실력도 금방 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인가 말씨에 경상도 사투리가 느껴져서 물었더니, 고향이 경상도이고 이민 가기 전에 부산에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민학교 5학년때의 담임 선생님을 참 좋아했는데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홀로 망망대해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여선생님에 대한 감정으로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찾을 수 있는지 한 번 알아 보겠다고 하였다. 하루 휴가를 내고 강동석씨의 모교인 청룡국민학교를 찾아갔다. 교감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옛날 서류를 확인하기도 하고 교육청에 전화도 하면서 수고해 주셨다. 제법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찾았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국민학교에 근무한다고 하면서 직접 전화를 하여 바꿔주셨다.

10년이 지난 일인데도 선생님은 강동석씨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요트와는 무전기로 교신하고 있는데 전화를 통하여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전화기/무전기 통화

약속한 날, 교신보다 일찍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2way 교신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말이 끝나면 “OVER” 라고 말해야 하는 등 교신 방법을 알려드렸다. 전화와 무전기를 서로 연결하려면 폰패치라는 장치가 있으면 편리하지만 당장 장치를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 내용을 들으면서 수동으로 PTT를 눌러줘야 했고 소리의 크기도 적절히 조절해야 했다. 또한 이렇게 통신 내용을 제 3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불법교신에 대한 책임은 나 혼자 감당하면 되기 때문에 감수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교신이 시작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하였다. 양손에 전화기와 마이크를 들고 있던 나의 손으로도 울컥하는 감정이 전해지면서 양손이 떨렸다. 두 사람은 그동안의 소식을 간단히 교환하고 한국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교신을 마쳤다. 그 후 두 사람은 서울에서 직접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동석씨가 부산 요트계류장에 도착하였을때 회사 일 때문에 나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쯤되면 대부분은 이 이야기와 글 제목의 연관성을 짐작하겠지만 세대가 다른 분들에게는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TV는 사랑을 싣고

KBS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중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1994년에 첫 방송을 하였고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약 16년 동안이나 방송되었다. 배우, 가수 등 유명인의 지인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학창시절의 은사, 군복무때의 동료, 또는 첫사랑 등을 찾아주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었고, 마지막에는 의뢰인과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그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강동석씨의 국민학교 담임선생님을 찾아 준 것은 “TV는 사랑을 싣고"보다 3년이 앞섰지만, 그 과정은 마치 “TV는 사랑을 싣고"의 무선판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제목을 “무선은 사랑을 싣고"라고 해 보았다.

강동석씨와의 교신 그리고 그 교신을 통하여 옛날 인연을 찾아줄 수 있었던 일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8 - 발해 1300호

에피소드 8

발해 역사 축소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 출신 대조영이 만주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 내륙으로는 만주와 연해주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바닷길로는 동해의 패권을 쥐고 해양국가로서도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과 정보가 워낙 없다보니, 중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일본 등은 고대사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발해의 역사를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 중 특히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발해가 동해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발해 1300호

발해 1300호. 그들이 목숨을 걸고 발해 항로 탐사에 나선 것은 천년이 넘도록 역사속에 묻혀 잊혀져가는 발해사를 우리 눈앞에 살려내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육지에는 유적이나 고고학적 유물을 구할 수 있다지만, 바다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아우르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교역했던 뛰어난 해양국가 발해의 역사를 탐사를 통해서 되살리는 것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탐사대장 장철수, 선장 이덕영, 촬영담당 이용호대원, 통신담당 임현규대원.

4명의 탐사대원을 태운 무동력 뗏목선 발해 1300호가 1997년 12월 31일 블라디보스톡 끄라스키노항을 출발하였다. 자금 문제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계획된 출항일인 11월 5일보다 많이 지연되었지만 겨울철 북서계절풍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항해가 순조로운 날은 많지 않았다. 혹한의 겨울 날씨에 거센 바람과 파도, 추위와 싸워야했다. 항해일지에 적힌 내용을 보면, 바람이 심하게 불때는 뗏목이 날아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추위, 수면부족, 허기 등으로 몸도 지치면서 감기약으로 겨우 몸을 지탱해야 했다.

HL0JQT/MM

통신 방법은 선박용 통신기도 있었지만 아마추어무선이 큰 역할을 했다. 통신을 담당했던 임현규대원이 해양대학교 햄클럽에서 활동했으며, 해양대학교 아마추어무선국장 임재희씨가 발해 1300호 항해지원단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발해 1300호의 호출부호는 HL0JQT/MM이었다.

항해 초기에 통신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1월 6일부터 아시아나항공 햄클럽의 HL2WA 오엠이 중계를 하여 많은 국내 햄들과 교신을 하였고, 그 후부터 국내햄과의 교신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하루에 10~20여국씩 꾸준히 교신이 이어졌다. 아마추어무선 교신을 통하여 많은 분들이 격려를 해 주기도 하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지원단에게 소식을 전해줄뿐만 아니라 국내 소식을 전해주기도 해서, 아마추어무선이 대원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교신도 있었는데, JN4GUV오엠 등은 우호적인 교신을 하였지만, 일부 일본햄은 호출부호 송신도 없이 음악을 틀거나 휘파람을 불었고, 특히 JQ1FEF는 강력한 신호로 방해를 하여 교신에 어려움을 겪었다. JN4GUV오엠이 일본 우정성과 감시소에 연락하여 협조를 요청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교신은 주로 7MHz에서 이루어졌지만 상태에 따라 21MHz도 이용하고 육지와 가까울 때는 2m 교신도 이루어졌다.

폭풍으로 항로 이탈

항해는 순조롭지 않았다. 울릉도에 접안하려 했으나 북동풍의 폭풍으로 인해 뗏목은 육지쪽으로 향했다. 울릉도의 불빛을 보면서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보급 지원을 받기 위해서 몇 차례나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후포항 41마일 지점까지 뗏목이 밀려갔을 때 겨우 해경으로부터 보급품을 전달받았다.


모두 지쳐있었지만 곧 부산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으로 뗏목은 점점 동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원단에서도 동경 129도 안으로 들어올 것을 종용했지만 탐사대의 노력과는 달리 뗏목은 일본 오키제도 방향으로 마냥 흘러갔다. 라디오 방송도 한국어는 점점 멀어지고 일본어만 들리기 시작했다.

해류 변화와 일본의 태도

독도 접안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폭풍주의보로 인해 이마저 무산됐다. 이제 남은 것은 오키섬으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본의 우익은 발해와 관련된 탐사대의 활동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며, 오키제도가 속한 시마네현은 일본에서 유일하게 독도를 타케시마라고 규정하고 조례를 통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극우익 성향이다. 탐사대는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일본측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결국 일본 상륙을 기정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월 23일, 일본은 IMF라는 한국의 경제 상황을 틈타 수십년간 이어져 온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새로운 경제수역 경계선을 설정하고 이를 수용하도록 강하게 압박했다. 동해상에 일본 순시선을 배치하고 한국 어선을 나포하거나 폭행 및 강제 철수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순시선에 들이받혀 침몰하는 등 위협적인 태도를 노골화했다.

(장철수 대장이 1월 23일 오후4시 무렵에 작성한 일기)
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오늘 한·일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의 정신.

도고섬 근접 및 교신

오후가 되면서 뗏목은 점점 도고섬(오키제도의 섬 중 하나)으로 밀려가고 바다는 거칠어졌다. 이대로 가면 뗏목은 섬에 충돌한다. 빨리 일본과 연락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원팀에서는 해경을 통해서 일본 해상보안청에 뗏목 구조를 요청했고 6시 30분경 일본에서는 뗏목의 위치 파악에 나서 오키섬과 가까운 지점에서 표류하는 발해 1300호를 확인했으나 파고가 워낙 높아서 당장 구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후 8시경, 도고섬과 불과 2km밖에 남지 않았다. 7MHz에서 국내햄과 교신이 되었다. HL5KY(나), HL2WA, HL0BLA(한국해양대학교), HL5IXC, DS1CAN 등과 교신이 되었다.(발해 1300호의 통신일지와 나의 로그북을 참조함) 전파상태가 나빠지면서 국내교신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와 HL2WA오엠의 신호는 HL0JQT/MM에서 충분히 수신할 수 있어서 마지막까지 교신이 이어졌다. 다행히 8시 50분경 일본 순시선이 왔다고 하였다.

“순시선이 왔다. 걱정할 필요없다” “순시선이 온 것이 사실이냐” “예, 맞습니다. 이제 준비해야 하니 안테나를 철거하고 교신을 종료해야 합니다.”

나와 HL2WA오엠은 안심하고 교신을 마쳤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목소리가 될 줄은 몰랐다.

발해 1300호의 전복

다음 날 아침, 발해 1300호가 전복되어 전원 순직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시선이 왔고 안심해도 된다고 했는데 전복되었다니. 당시의 일본의 행태를 볼 때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방송사에서 연락이 와서 마지막 교신 상황을 물었지만 “순시선이 왔다. 안심해도 된다"는 내용만 전할 수밖에 없었다. 녹음이라도 해뒀으면 좋았을텐데.

이틀 뒤인 1월 26일 사고비상대책위와 유가족단이 일본 현지에 방문하여 해상보안청이 제공한 비디오 녹화 자료, 현지 상황 등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고라고 결론지었다. 일본에서는 경비함 3척과 구조 헬기 4대를 급파했으나 초속 20m의 강풍과 4m 이상의 파고에 휩쓸려 암반에 부딪쳐 좌초된 뗏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쵤영된 비디오 자료를 보고나서야 당시의 상황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힘들었다고 판단하였다.

이번 에피소드는 나의 개인적 경험보다 발해와 발해 1300호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와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싶었다.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발해를 단순히 만주 대륙에만 머물렀던 국가가 아니라, 동해를 거침없이 누비며 대외 교역을 전개했던 진취적인 ‘해양 강국’이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현대적인 동력 장치 없이 오로지 돛과 바람, 동해의 해류만을 이용해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도를 거쳐 일본 오키 제도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과학적인 GPS 데이터와 항해일지/통신일지로 이를 입증한 것이다.

장철수(탐사대장, 38세), 이덕영(선장, 49세), 이용호(촬영, 35세), 임현규(통신, 27세)

대원들의 명복을 빈다.

발해 1300호 홈페이지의 글

발해 1300호 홈페이지: https://www.balhae1300ho.org

(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의 글 중에서)
왜 한겨울인 12월 31일에 출발했느냐고 질책하고, 겨울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느냐며 무모하고 경솔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번 뗏목 탐험을 나선 경험자로서, 해양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로서 말하건대 출발 시기나 출발 장소는 문제가 없었으며, 그들은 고증에 충실했다. 설사 무모했다 하자. 하지만 진실을 찾기 위해 생명을 건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용기란 결국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는 행위다.

그들은 역사의 진실에 충실했다.

(발해1300호 항해계획서 중에서)
계획된 출항일은 1997년 11월 5일이었지만, 출항준비의 어려움으로(국내의 지원이 거의 전무 했다) 발해1300호는 두달여 연기된 12월 31일 끄라스끼노 항구를 출항했다.

1300년전 발해국의 일본으로의 뱃길 중 일본도착일을 고려할때, 현재 확인되는 34차 중 19회가 음력 11월,12월,1월이었다. 즉, 일본으로의 1달미만의 항해기간을 고려하면 절반이상이 겨울철에 떠난 항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1300호는 이러한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출항시기를 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왜 발해국과 발해1300호는 겨울철 항해를 택했는가?

다름아닌 겨울철에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배적으로 부는 ‘북서계절풍’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으며, 일본에서 발해로 되돌아갈때는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부는 ‘남동계절풍’을 이용하기 위하여 여름철 항해를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