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때 처음으로 아마추어무선을 접하여 대학교 클럽국에서 활동하다가 1988년에 개인국을 개설하였다. 해외교신에 관심이 많아서 교신을 통하여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소중한 인연은 나와 호주햄과의 특별한 인연에 관한 실화이다.여행블로그에는 해외의 햄친구들을 방문한 여행기 등 여러가지가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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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때 처음으로 아마추어무선을 접하여 대학교 클럽국에서 활동하다가 1988년에 개인국을 개설하였다. 해외교신에 관심이 많아서 교신을 통하여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소중한 인연은 나와 호주햄과의 특별한 인연에 관한 실화이다.여행블로그에는 해외의 햄친구들을 방문한 여행기 등 여러가지가 내용이 있다.
이 이야기는 HAM을 통한 아름다운 인연에 관한 실화이다.
KARL지 2021년 11/12월호에 게재.
글. HL5KY.
Bernie는 1929년, 네덜란드 노르트홀란드주의 서쪽 도시 하를럼에서 태어났다. 한때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던 하를럼은 그 영화를 암스테르담에 넘겨준 채, 과거의 빛바랜 흔적만을 간직한 조용한 배후 도시로 남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태어나던 해 미국에서 촉발된 대공황의 먹구름은 대서양을 건너 네덜란드 전역을 짙게 짓눌렀다. 도시 곳곳에 가난이 스며들었고, Bernie의 집 역시 그 서글픈 그늘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대공황의 긴 그림자가 채 걷히기도 전인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터져 올랐다. Bernie가 열한 살을 맞이하던 1940년 5월 10일, 프랑스로 향하는 길목을 확보하려는 독일군의 군홧발이 네덜란드의 국경을 짓밟았다. 평온을 바라던 조국은 순식간에 거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개전 8일 만에 네덜란드는 항복의 깃발을 올렸고, 나치 독일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세상은 더욱 캄캄해졌으며, 나날이 가혹해지는 수탈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생계마저 송두리째 앗아갔다.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늘 배고픔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암흑의 시대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연합국의 반격 앞에 독일이 무릎을 꿇으며 1945년 5월 8일, 마침내 종전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포성이 멈춘 지 불과 나흘 뒤, 열여섯 살의 소년 Bernie는 낡은 가방 하나를 든 채 고향을 떠나 스웨덴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아무 연고도, 가진 것도 없는 이국 땅의 어린 이방인에게 허락된 자리는 가장 낮고 거친 곳뿐이었다. Bernie는 현지인들조차 꺼리는 국제 해운회사의 부두 하역부로 고단한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떼었다.
거친 바다를 오가는 화물선에서의 나날은 혹독했다. 일이 서툴러 쏟아지는 호통과 질책을 견뎌내는 것은 일상이었고,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치거나 암초를 마주할 때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했다. 다 큰 어른조차 버티지 못하고 떠나가는 뱃길 위에서, 숱한 동료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Bernie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냈다. 그 묵직한 성실함 덕분이었을까, 마침내 그의 오랜 땀방울을 눈여겨본 이들에 의해 그는 부두의 짐꾼에서 선박 기관실의 배관 보조공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기름 냄새와 엔진의 둔탁한 굉음으로 가득 찬 기관실은 단순 노역보다는 나았지만 결코 녹록지 않았다. 기계 이론은커녕 배관 도면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던 열여섯 소년에게 모든 것은 낯설고 두려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눅 드는 대신 타고난 호기심으로 기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손에 익힌 기술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 하나로 뜨거운 파이프 사이를 누비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소년의 거친 손에 굳은살이 단단히 배어갈수록 그의 기계 다루는 솜씨와 경력, 그리고 급여는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세월은 부지런히 흘러 입사 4년 차를 맞이한 1949년, 스무 살 청년이 된 Bernie는 마침내 대양을 가르는 장거리 원양 무역선에 올랐다. 배가 자주 닻을 내리던 곳은 일본 홋카이도 남단의 유서 깊은 항구도시 하코다테였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던 그 무역항에는 먼바다를 건너온 외국인 선원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골목이 있었고, 그 길목엔 서양과 북유럽의 맛을 내는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고향의 냄새가 그리워 그 골목의 한 작은 식당을 자주 찾던 Bernie는 그곳에서 일하던 한국인 여성 김윤희를 만나게 되었다. 낯선 항구의 분주함 속에서 오간 몇 마디의 인사는 이내 긴 대화로 이어졌고, 국경을 넘은 두 젊은 영혼은 자연스레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살아온 궤적과 모국어는 달랐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굳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깊은 교감이 있었다. 조국을 빼앗겼던 쓰라린 상처, 그리고 가족의 품을 떠나 먼 타국에서 홀로 생을 일궈가야 했던 외로움은 오직 서로만이 온전히 보듬어줄 수 있는 삶의 무게였다. 거친 파도를 따라 떠나야 하는 배편 때문에 하코다테에 머무는 날보다 먼바다에서 그리워해야 하는 날이 훨씬 길었지만, 물리적인 거리는 결코 마음의 장애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닿지 못하는 시간만큼 애틋함은 짙어져만 갔다.
그러나 짧아서 더 찬란했던 그들의 시절은 오래 머물러주지 않았다. 피어나기 시작한 사랑이 미처 활짝 꽃을 피우기도 전에, Bernie의 배는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항로 변경 통보를 받았다. 김윤희 역시 차가운 현실의 파도에 밀려 더 나은 생계를 위해 하코다테를 떠나야만 했다. 기약 없는 이별의 파도와 같이, 안개 자욱한 항구에 남겨진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안타까운 쉼표를 찍게 되었다.
다시 홀로 남겨진 Bernie는 묵묵히 뱃사람의 삶을 이어갔지만, 가슴 한구석에 남은 공허함과 새로운 삶을 향한 갈망은 그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기회의 땅을 찾아 남반구로 눈을 돌린 그는 1956년, 마침내 호주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배 위에서 다져온 손재주와 끈기를 밑천 삼아, 그는 보일러 메이커(제관공)로서 낯선 대륙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끝없이 광활한 대지에 비해 인구가 희박했던 호주에서 무선통신은 일상의 필수적인 도구였다. Bernie 역시 현장에서의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무전기를 잡았고, 특유의 호기심은 그를 보이지 않는 전파의 세계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그저 일터의 도구에 불과했던 무전기였지만, 허공을 가로질러 닿는 전파의 매력에 깊이 매료된 그는 마침내 1986년, 호출부호 VK4VJY로 정식 아마추어 무선국을 개설하게 된다.

[ VK4VJY의 무선실 ]
비슷한 무렵, 바다 건너 대한민국에서도 ‘김윤희’라는 또 다른 이름의 한 젊은이가 전파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풋풋한 대학 새내기 시절, 공부에 필요한 자료를 빌리러 선배를 찾아 들어간 곳이 우연히도 아마추어 무선 동아리 방이었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미지의 세상과 교감하는 이 마법 같은 세계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단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아마추어 무선의 깊은 울림에 점차 젖어 들던 김윤희는 1985년 가을, 마침내 아마추어 무선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부산대학교 동아리 클럽국인 HL0M의 마이크를 잡고 전파의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발걸음은 어김없이 동아리 방으로 향했고, 주말에도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무전기 앞을 지킬 만큼 그녀의 열정은 뜨거웠다.
어느 주말, 텅 빈 동아리 방에 홀로 나와 한창 교신에 열중하던 중 갑자기 무전기가 먹통이 되며 교신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기계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새내기였기에, 애타는 마음을 뒤로한 채 아쉬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선배들이 끊어진 퓨즈를 간단히 갈아 끼우는 모습을 본 그녀는 그날 이후 가방 한구석에 여분의 퓨즈를 챙겨 다니며, 무전기가 멈출 때마다 스스로 퓨즈를 갈아 끼워서 교신을 이어 나가곤 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1986년의 봄 어느 날, 김윤희는 여느 때처럼 21MHz에서 CQ를 내고 있었다.
김윤희: “CQ CQ CQ This is HL0M, Hotel Lima Zero Mike. HL0M calling CQ and standing by.”
무전기의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리던 Bernie가 김윤희의 CQ를 듣게 된다.
‘한국의 무선국이군. 게다가 YL(Young Lady, 여성 무선사)이라니…’
Bernie는 얼른 송신 준비를 하고 호출한다.
Bernie: “HL0M, HL0M. This is VK4VJY, Victor Kilo Four Victor Juliet Yankee, over”
김윤희: “Ok, VK4VJY this is HL0M. Thank you very much for the call. Your signal is five and seven. 57. Very nice signal into Korea. My QTH is Pusan, Papa Uniform Sierra Alfa November. Pusan, Korea is my QTH. Name here is Yuni, Yankee Uniform November India, Yuni is my name. Back to you. VK4VJY this is HL0M.”
“VK4VJY 여기는 HL0M. 당신의 신호는 57입니다. 여기는 한국의 부산입니다. 이름은 Yuni입니다. 마이크 받으세요. 오버”
수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대의 이름에 Bernie는 깜짝 놀란다.
‘Yuni라니. 나의 첫사랑이었던 그 윤희와 이름이 같지 않은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Bernie: “Very good, Yuni. What is your full name?”
“잘 알았습니다, Yuni. 그런데 당신의 full name은 무엇입니까?”
김윤희: “My full name is Yuni Kim. Kilo India Mike. Yuni Kim.”
“저의 이름은 김윤희입니다”
Bernie: “Oh my goodness. Yuni, Yuni Kim. What a surprise! I can’t believe it.”
‘아니, 김윤희라고. 그녀와 이름이 같지 않은가. 이럴 수가…‘
김(Kim)이라는 성씨가 한국에서 얼마나 흔한지 알지 못했던 Bernie는 또 한번 놀란다.
’그녀라고 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젊어. 그렇다면 혹시 그녀의 가족인가.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걸까…‘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인 교신은 계속 이어지고, 두 사람은 다시 교신하기로 약속하고 아쉬운 교신을 마쳤다.
이렇게 시작된 Bernie와 김윤희의 교신은 정기적인 스케쥴 교신으로 이어졌다. Bernie는 네덜란드어로 할아버지를 뜻하는 ‘Opa’라는 단어를 알려주며 자신을 친근하게 Opa라고 부르도록 했다. 전파상태도 좋았지만 양쪽 모두 성능이 좋은 빔 안테나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깨끗한 신호로 교신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21.155MHz에서 나누는 정겨운 대화는 태평양 상공의 유명한 교신이 되었다.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호주,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마추어 무선사와 단파청취자(SWL)들이 시간에 맞춰 이들의 주파수에 귀를 기울였고, 정성스런 수신 보고서(리포트)를 보내오기도 했다.
당시에 부산의 공식적인 영문표기법은 Pusan이었다.
SWL은 단파청취자(Short Wave Listener)를 말하며, 주로 아마추어무선사들의 교신을 수신하는 사람을 말한다. SWL 활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무선통신에 대한 지식 및 통신술을 습득할 수 있으므로 햄이 되기 전에 필히 거쳐야 할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일반적으로 수개월에서 수년간의 SWL 기간을 거치는데, 평생 SWL로만 머무는 사람들도 있다.
두 사람의 교감은 전파를 넘어 현실로 이어졌다. 서로의 마음을 담은 편지와 선물이 오갔다. 김윤희는 한국 전통 인형과 토속 공예품을 보냈고, Bernie는 호주 원주민의 손길이 담긴 기념품을 보내왔다. 특히 악필이었던 Bernie는 글 대신 카세트테이프에 자신의 음성을 담아서 보내곤 했는데, 그렇게 김윤희에게 전해진 테이프만 해도 200여 개가 훌쩍 넘었다.

[ 한국 인형으로 장식된 Bernie의 방 ]
국경과 세대를 뛰어넘은 전파의 우정이 한 해를 넘겨 깊어가던 무렵, 김윤희는 어느덧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게 되었다. 졸업 후 취업을 하게 되면 더는 학교 클럽국(HL0M)의 무전기 앞에 앉아 마음껏 교신을 즐기기 어려워질 터였다. 당시 여건상 개인 무선국을 새로 개설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었다.
이별의 아쉬움과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김윤희는 Bernie에게 조심스레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앞으로 전파를 통해 만나는 일은 뜸해지겠지만, 편지와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담아 변함없이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Bernie에게 김윤희와의 정기 교신은 어느새 삶에서 가장 손꼽아 기다려지는 소중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더는 전파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그에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홀로 깊은 고민을 거듭하던 Bernie는 마침내 큰 결심을 내렸다. 윤희가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무선국을 열 수 있도록, 무전기 풀 세트와 빔 안테나를 장만해 한국으로 보내주기로 한 것이다.
그가 정성껏 꾸려 보낸 장비는 당대 명기로 손꼽히던 TS-520 트랜시버를 비롯해 튜너, 외부 스피커, 외장 VFO, 디지털 주파수 표시기 그리고 빔 안테나까지 완벽히 갖춘 풀 라인업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귀하고 값비싼 장비들이었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연을 전파 너머로 지켜보며 자주 어울리던 호주의 또 다른 무선 친구 VK5YM 역시 안테나 지지용 베어링을 보태며 따뜻한 응원을 건넸다.

[ TS-520 세트 ]
커다란 소포들이 태평양을 건너 부산에 닿던 날, 김윤희는 홀로 광안리의 국제우체국으로 달려가 묵직한 무전기 상자들을 조심스레 택시에 실어 날랐다. 며칠 뒤 따로 도착한 거대한 안테나는 용당세관에 가서 직접 찾아와야 했다. 여대생 혼자 감당하기엔 벅찬 크기였지만, 그보다 더 큰 난관은 세관 직원이 내민 무거운 관세 고지서였다.
“가난한 학생에게 호주의 할아버지가 취미 생활을 즐기라고 보내주신 순수한 선물인데, 여기에 무슨 세금이 붙나요…”
막막함에 눈물을 글썽이며 간절히 호소한 끝에, 사정을 딱하게 여긴 세관 측의 배려로 겨우 면세 통관을 받을 수 있었다.

[ 빔 안테나 ]
우여곡절 끝에 장비는 집으로 들여왔지만, 기계 다루는 법을 잘 모르던 그녀에게 옥상 위에 거대한 안테나를 세우고 장비를 세팅하는 일은 또 다른 벽이었다. 다행히 부산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던 HL5BCW, HL5BEF, HL5BUC 등 여러 무선 선배들이 발 벗고 나섰다. 선배 무선사들의 땀방울 덕분에 옥상 위에는 은빛 빔 안테나가 위풍당당하게 올라섰고, 장비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마침내 무선국 허가와 함께 HL5BTF라는 그녀만의 고유한 호출부호를 받게 되었다.
그날 이후 김윤희는 자신의 방에서 편안하게 Bernie와 스케줄 교신을 이어갈 수 있었고, 더 넓은 전파의 바다를 누비며 전 세계와 소통하는, 보다 풍성한 햄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 임용 발령을 기다리던 시기, 예상치 못한 행정적 지연으로 대기 기간이 길어졌지만 이는 오히려 그녀에게 값진 기회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부산 요트경기장에서 무선통신 지원과 VIP 전담 통역 봉사를 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고, 전파로 돈독한 정을 나눈 일본 무선 친구들의 초청으로 떠난 한 달간의 일본 여행은 아마추어 무선사가 아니면 결코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작고하신 HL5MK 님의 추천으로 부산 일본영사관에서 사회 첫 발을 내딛는 소중한 기회도 얻었다. 그리고 날마다 넓어지는 세상을 바라보며, 김윤희는 마침내 새로운 도전을 꿈꾸기 시작했다. 바다 너머 그리운 ‘오파(Opa)’ Bernie가 살아가는 호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차근차근 그 여정을 준비해 나갔다.
호주 유학을 준비하던 무렵, 김윤희는 우연한 기회에 대학 선배인 나(HL5KY)와 전파를 통해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모교 클럽국(HL0M) 동기들과 매주 정기적인 스케줄 교신을 나누고 있었는데, 마침 내가 동기 중 한 명인 HL5BCT의 집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마이크를 넘겨받게 된 것이었다. 얼마 후 알래스카에서 활동하던 미국의 아마추어 무선사 Marty(AL7JF)가 자주 교신했던 김윤희를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차량 운전을 도우며 함께 길 안내에 나섰다. 전파 너머의 인연을 현실로 안내하던 그 길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의 거리도 한층 가까워졌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갔고, 1990년 따스한 봄날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즈음 김윤희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교직 생활도 함께 시작했다. 낯선 학교 업무와 서툰 살림을 병행하느라 하루하루가 분주하게 흘러갔지만, 그런 일상 속에서도 바다 건너 Bernie와의 정기 스케줄 교신만큼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한편, 호주의 Bernie는 깊은 인생의 그늘을 지나고 있었다. 오랜 불화와 갈등 끝에 결국 소중했던 가족들과 결별하게 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 참혹한 전쟁의 포화를 겪고 가족과 생이별한 채 머나먼 타국을 떠돌다 겨우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맛보게 되었는데, 또다시 홀로 남겨지게 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마음의 상처가 깊어 무전기 앞을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는 김윤희와의 끈만큼은 끝내 놓지 않았다. 거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에게 김윤희는 단순한 무선 친구를 넘어, 핏줄보다 더 진한 온기를 나누어준 유일한 가족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 유언장 ]
가진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세상에 남길 마지막 전부를 김윤희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정식 유언장을 작성했다. 훗날 김윤희가 호주를 방문했을 때, Bernie는 한평생 소중히 간직해 온 여덟 개의 영롱한 오팔 원석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깊은 진심과 사랑을 건넸다.

[ Bernie의 집에 방문한 김윤희 ]
시간이 흘러 각자의 삶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고, 전파를 통한 Bernie와의 만남 역시 변함없이 이어지던 1994년 늦은 가을, Bernie가 갑작스레 한국을 찾아오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 부부 모두 직장에 매여 있는 데다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처지라, 김윤희의 방학 기간에 맞춰 와주시기를 부탁드렸지만 그는 굳이 지금 당장 가야만 한다며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밤, Bernie는 그토록 서둘러 바다를 건너온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전립선 질환으로 큰 병원을 오가며 검사를 받아왔는데, 의료진으로부터 전립선암이 강력히 의심된다는 소견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질환이라면 치료의 희망이라도 품어보겠지만, 만에 하나 암이라면 당시의 의술로는 손을 쓰기 어려운 시한부나 다름없다고 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친딸과도 같았던 김윤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꼭 보고 싶어 무리하게 길을 나섰노라고. 혹여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 우리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사후 절차까지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여행자 보험에 미리 가입해 두었다며 떨리는 손으로 보험증서를 내밀었다. 당시 호주에서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으면 6개월을 넘기기 힘들 만큼 서양인들에게 유독 치명적인 공포의 병이었기에, 그의 고백은 우리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 김윤희의 딸과 Bernie ]
그렇게 시작된 약 두 달간의 한국 생활 속에서 Bernie는 점차 낯선 타국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우리 부부가 출근하고 나면 홀로 동네 어귀에 나가 말은 통하지 않아도 손짓으로 이웃 어르신들과 정을 나누기도 하고 집안 청소를 돕기도 했다. 겉으로는 더없이 평온하고 따뜻한 나날이었지만, 야속하게도 그의 걸음걸이는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 HL0M 방문,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곳 ]
그 무렵 나의 아버지께서는, 김윤희에게는 부모나 다름없는 고마운 분이라며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하셨고, 그렇게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정겨운 대화가 오가던 중 자연스레 Bernie의 건강 이야기가 나왔다. 그가 전립선 질환으로 힘들어한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오랫동안 건강식품 관련 일을 해오셨던 경험을 바탕으로, 전립선 건강에는 꽃가루만 한 것이 없다며 적극적으로 권하셨다. 대개 서양인들은 동양의 약제에 신비한 효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이 말을 들은 Bernie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았고 그는 바로 먹어보겠다고 하였다.
마침 집에 챙겨둔 꽃가루가 있어 그는 그날부터 곧바로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이른 아침,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문을 열자 상기된 얼굴의 Bernie가 서 있었다. 그동안 소변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통스러웠는데, 방금 전 제법 연속적으로 시원하게 소변을 보았다며 상당히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기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시적인 플라시보 효과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스쳤다. 하지만 다행히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날이 갈수록 걷는 모습도 눈에 띄게 나아지고 소변 상태도 몰라보게 좋아져서, 두 달후 호주로 돌아갈 즈음에는 거의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호주로 가기 전에 꽃가루 2통을 정성껏 준비해 주었다.
호주로 돌아가서 병원 진료를 받았을 때, Bernie의 건강 상태를 살펴본 의사들은 모두 놀라며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Bernie가 한국에서 가져온 꽃가루 이야기를 들려주자, 병원에 있던 사람들까지 신기해하며 그 꽃가루를 얻으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한다.
가져간 2통을 다 먹고 나서도 다시 더 보내주려고 하였으나, 호주는 동식물에 대한 검역이 워낙 까다로워서 일반 소포로는 보낼 수가 없고 인편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 당시에 아시아나항공이 케언즈로 운항하고 있었는데, 케언즈 공항은 다소 검역이 수월한 편이어서 이곳을 통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마침 아마추어 무선 동료인 HL5UMO 님이 호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케언즈로 들어가서 Bernie에게 꽃가루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케언즈에서 Bernie가 사는 퀸즐랜드주 남쪽까지는 육로로 무려 1,500km에 달하는 먼 길이었는데도, 그는 흔쾌히 버스로 이동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신통했던 꽃가루는 사실 한국산이 아니고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제품이었다. 어찌 되었든 Bernie는 그 이후 더 이상 병원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태양 흑점 활동이 점차 줄어들자 전파 상태도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김윤희가 살던 도심 환경은 단파대(HF) 잡음이 심해, 종종 Bernie의 신호가 거친 노이즈 속에 파묻히곤 했다. 그때까지 초급(Novice) 자격이었던 Bernie는 송신 출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고, 안정적인 원거리 교신에 유리한 ‘골든 밴드(Golden Band)’인 14MHz 대역도 운용할 수 없었다.
골든 밴드(Golden Band) : HF의 밴드 중에서 14MHz는 태양흑점지수가 다소 낮은 시기에도 원거리 교신이 잘 되기 때문에 골든 밴드라고 한다. 대개 상위 급수의 자격 취득자만 사용할 수 있다. 원거리 교신이 원활하기 때문에 평생 14MHz만 사용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중 VK3MO는 5el 4스텍 (20el) 안테나를 사용하여 14MHz만 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력을 높이고 주파수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교신하려면 상위 자격을 취득해야 했다. 당시 호주의 아마추어 무선기사 시험은 문제은행식이 아니었기에 고령의 Bernie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김윤희와 더 또렷하게 목소리를 나누겠다는 일념 하나로 늦은 나이에 모스 부호(CW)를 익히고 까다로운 무선 공학 이론을 파고들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95년 그는 호주 최고 등급 자격인 ‘Unrestricted license’를 당당히 손에 쥐었다.
그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김윤희의 호출부호(HL5BTF)와 같은 끝자리(서픽스)인 ‘BTF’를 쓰기 위해, 이미 해당 호출부호를 보유하고 있던 무선사를 몇 번이나 직접 찾아가 간곡히 사정을 설명하고 양보를 받아냈다. 복잡한 행정 절차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는 VK4BTF라는 호출부호를 받게 되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호출부호 끝자리가 ‘BTF’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 리니어앰프가 놓여 있는 Bernie의 무선실 ]
젊은 시절 Bernie가 보내준 무전기와 안테나 덕분에 김윤희가 개인 무선국을 열 수 있었듯, 이번에는 그의 값진 자격 취득을 축하하고 오랜 고마움에 보답할 차례였다. 우리는 그를 위해 고출력 리니어 앰프를 선물하기로 했다. 앰프의 무게가 워낙 육중해 별도의 특수 포장 박스를 제작해야 했고 비싼 국제 운송료도 부담이었지만, 우리는 감사와 축하의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다.
묵직한 앰프를 받아 든 Bernie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태평양을 건너오는 그의 신호는 주변의 노이즈를 뚫고 더욱 강하고 안정적으로 수신되었다.
그 후로도 전파를 타고 흐르는 우리의 우정은 계절을 거듭하며 깊어졌다. 건강을 되찾은 Bernie는 새로운 반려자를 만나 따뜻한 가정을 다시 꾸렸고, 한층 활발해진 그의 아마추어 무선 활동과 젊은 시절 이야기는 여러 개의 지역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 지역신문에 게재된 Bernie의 이야기 ]
세월이 흘러 전파 환경의 변화와 나이로 인해 단파대(HF) 교신이 뜸해질 때도 있었지만, 인터넷과 디지털 통신의 발달 덕분에 우리는 형태를 바꾸어가며 변함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온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그 어떤 강력한 전파도 영원할 수 없었다. 2020년, 늘 태평양 너머에서 따뜻하게 우리를 불러주던 Bernie는 끝내 영원한 침묵(Silent Key)에 들었다. 이제 주파수 다이얼을 아무리 돌려보아도 수신기 너머로 들려오던 그의 다정한 목소리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아마추어 무선이라는 마법 같은 세계를 통해 수많은 인연을 만났지만, 허공을 가로질러 피어난 Bernie와의 만남은 우리 삶에 가장 눈부시고 특별한 기적이었다. 비록 그의 신호는 멈추었지만, 잡음을 뚫고 서로의 마음에 닿았던 그 모든 교신의 순간들은 꺼지지 않는 전파처럼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울려 퍼질 것이다.
SK : Silent Key의 약자로 돌아가신 햄을 뜻한다. 다른 뜻으로, 전신교신을 마칠 때 마지막에 S와 K를 붙여서 송신하는 것은 교신을 종료한다는 의미이다.
흔히 아마추어 무선은 전파와 기계를 다루는 기술적 취미로 여겨지지만, 김윤희에게 무선 통신은 미지의 세계와 마음을 잇는 따뜻한 소통의 창구였다. 그녀는 기계적인 호기심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교류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전파 덕분에 국경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수많은 친구들과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처음 무선에서 만났을 때 17살 소년이었던 독일의 Michael(DL9LBD)과는 정기적인 교신은 물론이고 손편지를 수없이 주고받으며 소년 시절부터 청년기까지를 함께 나누었다. 각자 가정을 꾸린 후에도 변함없이 소식을 전하던 두 사람은, 2012년 김윤희가 독일을 방문하여 교신 후 20여 년 만에 마침내 직접 얼굴을 마주했다. 풋풋했던 소년은 어느덧 초등학교 고학년 딸아이를 둔 듬직한 학부모가 되어 있었다.
일본의 Keiko(JJ3GNR)는 다정한 친언니 같은 햄이었다. 평소 어학에 관심이 많았던 두 사람은 교신을 나눌 때마다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주고 배우며 남다른 정을 쌓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전파 대신 전화와 편지로 안부를 묻고, 때때로 바다를 건너 서로의 집을 오가며 변치 않는 자매 같은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 밖에도 전 세계 하늘 아래에는 언제 찾아가도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가족 같은 친구들이 가득했다. 언제든 따뜻하게 맞아주는 DJ6EA, ZL1SN, VK3AZN은 물론, 김윤희를 ‘한국의 여자친구’라 부르며 유쾌하게 마이크를 잡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ZS2ABC, 은하수가 쏟아지는 언덕 위 그림 같은 집에 살던 뉴질랜드의 ZS2ABC, 은하수가 보이는 언덕위의 집에 살았던 ZL1AIF, 구수한 한국 노래를 즐겨 부르던 일본계 미국인 WA6FPK, 친부모처럼 푸근하게 품어주던 호주의 VK2AHJ 부부, 한국의 매력에 흠뻑 빠져 한국인과 백년가약을 맺은 VK2CCK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그녀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다.
미국 연수 시절, 한국의 동료들과 함께 만났던 KB6TJX는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며 신사다운 매너로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VK5YM, N6POP, VK4ADZ, ZL2AOH처럼 이미 영원한 침묵(Silent Key)에 든 그리운 이름들도 있지만, 그들이 남긴 온기는 여전히 남아 지금도 그 가족들과 정답게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전파가 맺어준 이 아름다운 만남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김윤희의 인생에 영원히 빛나는 보석으로 자리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아마추어 무선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사람, 그리고 인연”이라고 말하고 싶다.
홀로 무선실에 앉아 즐기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취미, 저편의 상대가 응답해 주어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취미, 차가운 쇳덩이 같은 무전기를 만지지만 결국 가슴 뜨거운 사람과 마주하는 취미. 이것이 바로 내가 평생 사랑해 온 아마추어 무선의 참모습이다.
허공을 향해 띄우는 ‘CQ’ 한마디로 시작되는 만남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기적처럼 소중한 인연이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Bernie를, 누군가의 김윤희를 꿈꾸며 설레는 마음으로 PTT 스위치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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